봉수면 신현(新峴)마을
옛시절 봉산면(鳳山面)지역으로서「담안」이라거나 새들(신평), 새말기(새말, 신촌)로 불리기도 했던 마을이라고 한다. 지금은 신촌(新村)과 장류(長柳)마을 과 또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 국사봉 중턱의 획계(획기)란 뜸이 포함된다. 담안이란 지명은 신촌(새말)마을앞인데 옛시절 한집안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바깥으로 돌담부랑(돌담장)을 쌓았다는 것이다. 장류는「진버들」로 불리우는 마을인데 개울둑을 따라서 길게 버들 숲이 있었던 곳이라 자연스럽게 동리명이 되었고 한자표기를 하면서 장류로 했다고 한다. 획계(획기)는 국사봉의 중턱의 큰골과 절골사이에 있었으며 협계(峽溪) 또는 협곡(峽谷)에서 비롯된 말이 변음 되어 쓰인 지명으로 추측되지만 확인할 수 없다. 신현마을 뒷산은 필봉산이라는데 이는 산의 생김새가 붓을 거꾸로 세운 모양이라서 그렇다고 한다. 신촌마을도 이랫웃뜸으로 나누어져 있고 장류마을은 조금 떨어져 있지만 버들 숲처럼 길쭉한 형태다. 획계의 절골이란 곳은 대동사(大同寺) 큰절의 부속 암자가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가파른 산길을 오르내리기 불편해서 그렇지 그 자리는 집터로도 좋을 뿐 아니라 물이 더 좋다고 한다. 뒤로는 국사봉이 버티고 서 있고 동네 앞으로는 땅심 좋은 들이다. 옛날 의관(議官)을 지낸 신종희(申鐘禧)란 분이 살았는데 이분은 닥종이를 쳐서 서울이며 개성까지 가져가서 파는 종이장사였다고 한다. 이분은 돈도 많이 모았지만 인심이 후하여 이 지역의 어려운 민초들을 돕는 일을 변함없이 계속 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의 뜻을 모아서 전의관신종희송덕불망비(前議官申鐘禧頌德□忘碑)를 세웠다고 한다. 또 길가에는 허건(許健)공의 부인 경주김씨의 포행비와 김동익(金東翼)공의 부인 밀양박씨의 효부비도 서 있다. 임란창의 18장중의 한분으로 널리 알려진 허자대(許子大)의병장을 추모하는 인익재(仁翼齋)가 있고 밀양손씨 문중의 일신재(日新齋), 장류에는 경주김씨문중의 계림재(溪林齋)가 있다. 원래 이 마을에 잇던 쌍절각(雙節閣)은 지정면 성산리 기강나루 쪽으로 이건 해 갔다. 이 마을에는 김해 허씨가 먼저 들어오고 뒤이어 여러 성바지가 비슷한 시기에 들어왔다는데 지금은 신촌이 38가구, 장류가 19가구다. 경주 김씨 25가구, 허씨 9가구, 손씨 8가구, 최씨 4가구에 강·고·박·윤씨 등은 두어집씩으로 전체 56가구가 살고 있다. 그리고 이동리 뒤편 산자락에는 영모재(永慕齋)란 현대식 건물의 재실이 있다. 앞서 말한 신종희 공을 추모하는 재실이며 옆에 내외분 묘소가 있다. 묘비에는 행현릉참봉중추원의관(行顯陵參奉中樞院議官) 일범거사평산신공휘종희지묘(一帆居士平山申公諱鐘禧之墓) 배숙부인청송심씨(配淑夫人靑松□氏)라 새겨져 있다. 이 재실은 신학빈(申學彬)씨의 별장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은 자기 부모님의 묘소와 재실이다. 그리고 신종희공의 제씨되는 분은 관희(寬禧)공인데 이분도 의령서동에 살면서 어려운 사람을 도와준 일 때문에 서동동민이 세운 송덕비가 의령교회앞에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