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령읍 척곡(尺谷)마을
의령읍에서 서남방으로 약 십리길인데 쑥 들어앉은 동네로서 세 뜸이다. 요즘은 모두「척곡」으로 부르지만 옛 이름으로는 「자고개」「자실」이었다. 이 동네 사람으로 출가한 분들의 택호가 모두 「자실띠기」(자실댁)다. 동구 밖 한길가에는 삼충각(三忠閣)과 효열절부비 등만 보아도 덕곡면 제촌(諸村)의 명성을 짐작케 한다. 가산란(嘉山亂)에 전공을 세운 제경욱(諸景彧)장군, 임란때 용전순절한 제말(諸沫) 제홍록(諸弘祿) 두 장군의 충절을 기리고자 왕명으로 세운 정려이다. 여기서 조금만 더 들어가면 동네가 있고 바로 뒤가 벽화산이다. 남향받이 뜸은 「양지말」이고 그 아래가 「중말(중간마을)」이고 맨 아래 뜸이「음지말(음지뜸)」로 큰 동네는 아니다. 동명의 유래는 여러 가지인데 잣대모양으로 길쭉한 골짜기라서 잣골=자실이 되었다는 것이고 또 남북으로 높은 산줄기가 솟아 있을 뿐 아니라 골이 좁아서 잣대를 걸칠 수 있다해서 잣대고개=자고개로 부르게 됐다고 한다. 마을을 지나 골안 깊숙이 들어가면 안골이라는 곳으로 처음 동네터였고 「약물새미」가 유명하다. 한겨울엔 김이 솟고 오뉴월이면 냉천으로 변할 뿐 아니라 수량도 한결같고 속병 다스리는 약물이라고 한다. 그래서 안골재를 「새미꼬(샘고개)」라고도 하는데 화정 석천마을로 통한다. 조금 위가 절터다. 옛날 규모가 큰 절이 있었던 곳이다. 나직한 고개라서「작은재」, 길마모양의 지형이라「질매재」, 벽화산성 중허리의「큰재」, 수암마을로 통래하던 「산꼬(산고개)」등 민초들의 애환이 담긴 소로잿길이 많았다. 산고개 밑쪽에 「느러더미」란 큰 덤이 있는데 병풍처럼 죽 늘어서 있는 덤(바위)이란 뜻이다. 여기서 더 들어가면 「장개터」란 곳으로 지금은 목장이다. 그 곳에서 어느 지체 높은 분이 은둔생활을 했던 터가 장자터란 말이 변음돼서 「장개터」가 되었다고 한다. 산성 및 산자락에는 「비륵」이라 부르는 큰 덤이 있는데 영험 있는 바위로 보고 있다. 마을 앞쪽으로 길게 뻗어나온 산줄기를 「똥매산」이라는데 동산 동뫼가 경음화 해서 된소리가 된 것이다. 산자락은 「찰방멧등」이라 부른다. 아마 찰방벼슬을 했던 어느 분의 묘인 것 같다. 동네 뒷산은 제씨종산으로「뒷모」라 부른다. 역시 뒷산 뒷뫼 뒷모로 변한 것 같다. 이 곳 산등성이가 온통 고분이며 도굴이 극심했다. 벽화산성 바로 밑에도「몰무덤」또는「고래장터」라는 대형 고분 몇 기가 있지만 철저하게 도굴된 상태다. 몰무덤은 말무덤이란 말이며 고래장터는 고려장을 했던 사람 무덤이란 뜻이다. 이 고분 주위에서 수습된 토기편이나 유구의 형태로 보아서 가야시대의 고분으로 보고 있다. 이곳 세뜸에는 칠원제씨가 아닌 타성받이는 석집이상 불어나지도 않는 다는 속설이 있어서 그런지 제씨는 37집으로 대성인 반면 주씨·박씨가 두어집씩이고 왕·노·안·홍씨등 여러 성받이가 있지만 그저 한두집씩이다. 별다른 문화유적은 없지만 주위에 분포돼 있는 고분은 더 늦기전에 발굴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