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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장 사명대사 홍보 안내판 설치(수도사)
임진왜란 최고의 의병장이 사명대사인 것은 불문가지의 진실입니다.
그런데, 사명대사의 주요 활동지가 의령지역과 수도사인 것을 아는 사람들이 별로 없고 의령군 또한 아무런 관심조차 없습니다.
따라서 우선 수도사에 사명대사 홍보안내판을 설치하고 의령지역의 사명대사 활동관련 연구조사를 진행하여 임진왜란 의병활동의 주활동무대로 호국의령의 역사를 재정립하고 널리 알렸으면합니다.
의령 수도사는 1594년 임란왜란중 사명대사 승병군의 본거지였다.
사명대사의 본래 법명은 유정(惟政)이며, 자는 이유(離幼), 별호가 사명(四溟)이다. 따라서 승병장(僧兵將)이 된 이후 대사를 사명대사로 통명되었다.
도원수 권률 장군의 연패로 영남지역의 전세가 불리해지자 대사는 전체 승병을 이끌고 의령으로 내려와서 의령 수도사를 거점으로 고성 옥천사와 사천의 운흥사에 주둔하게 하고 의령에서 전체 승군을 지휘하면서, 당시 의령 유곡 세간에서 의병을 일으킨 의병장 곽재우와 합세하여 창녕 화황산 전투, 진주성, 거름, 정암진, 성산등지에서 승리하여 전세를 돌려 놓았다.또한 전국 각 사찰에 봄보리를 심도록하여 수확한 보리쌀과 시주미를 모아 군량미 4,000여석을 모아 승군의 식량으로 비장하기도 하였다.
--보물1301호 해인사 석장비 내용--
그리고 [분충서난록]에 의하면 사명대사는 1594년 의령에 주둔하면서 갑오년 4월 / 갑오년7월 / 갑오년 12월/세번에 걸쳐서 가또기요마사(가등청정)진영에 들어가 담판을 하면서 적정을 살폈고, 갑오년 5월 유정도덕부에서 전황을 협의하였고 -- 분충서난록 --
갑오년 9월에 적을 토벌하고 백성을 보호할 일을 말씀드린 소장을 작성하여 의령에서 한양도성으로 이동하여 임금께 상소하였다.
이에 선조는 승병장으로서 대사의 잠적을 치하하며 대사의 정예병이 왜적을 참획한 공적을 인정하여 군직을 내렸으나 대사가 이를 거절하자 이에 의령전투의 공적을 치하하며 당상관으로 제수하였다.--분충서난록 / 보물1301호 해인사 석장비--
임진왜란 당시 승군은 사찰을 거점으로 주둔하였다는 것이 일반화된 사실인데 사명대사가 의령 주둔시에 의령지역의 중심사찰은 수도사였으며 이미 왜군에 의해서 소실된 폐허위에 사명대사가 지휘부를 설치하였을 것이다.
왜적이 1차 진주성 공격시 곽재우장군의 정암루전투에서 패전하였는데 의령수도사가 지리적 정신적으로 의병전투의 거점중에 하나였을 것이다.
따라서 왜적이 2차 진주성 공격시 의령수도사를 주요 공략대상으로 삼았을 것이며 이것이 수도사가 소실된 원인이다.
또한 사명대사는 폐허가 된 수도사에 지휘부를 두고 승병을 지휘하였는데 전쟁중에도 부처님께 공양을 올렸으며 그때 사용한 향로를 수도사를 떠나면서 수도사 중건후에 돌려주기 위해 수도사라 각인하여 고성 옥천사에 보관하게 했는데 현재 문화재로 지정 되어 있다.(호)
이와 유사한 향로가 사명대사 제향사찰인 표충사에 보관되어 있는데 국보로 지정되었다.따라서 문화재 고성 옥천사 향로와 국보 표충사향로와 사명대사, 그리고 의령수도사는 밀접한 관련이 있고 사명대사가 의령 수도사에 주둔한 증거물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국보표충사 향로는 선조가 사명대사에게 하사한 향로로 알려져 있다.)
--- 문화재 고성옥천사 향로/ 국보 표충사 향로--
곽재우 장군과 의령 수도사의 관련을 살펴보면 곽재우는 남명 조식의 문하인데 유교경서외 제자백가,불교, 노장사상, 천문지리, 의학 ,병법등 다양한 분야를 습력하였다 또한 계룡산 전설에 의하면 남명조식은 국선풍류도인이고 곽재우는 계룡9선의 필두인 구봉 송익필의 제자로 이순신장군과 의병장 조헌 고경명,영규대사등과 함께 수행하였다.— 계룡산 칠월칠석구선재--
인진왜란 당시 곽재우장군의 사상과 병법 전투상황 그리고 전후행적을 살펴보아도 고구려 조의선인, 신라의 화랑도의 맥을 이은 국선풍류도와 곽재우의 관계가 밀접하다 할 것이다.
1608년 10월 16일 곽재우장군의 하교거절이 이를 증명한다 — 신의 선도가 이미 이루어져 부르심에 나갈수 없습니다. 원컨대 신이 천하의 지극히 어려운 일을 이루도록 해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출처 계암 일록 저자 김령--
또한 임진왜란 황해도 의병장중 한분인 의염대사는 속명이 곽수언(郭秀彦)으로 곽재우 장군의 일가이다 따라서 곽재우 장군은 불교에 친화적인 사상을 가졌으며 왜군의 1차 진주성 공격시 정암루 전투를 임하면서 지리적 .정신적 요충지인 수도사를 의병의 거점중 하나로 삼았을 것이고 이것이 왜적의 2차 진주성 공격시 수도사가 소실된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선조는 대사의 불성(佛性)과 강명(講明)한 그의 품성, 임란중의 대치(大致)를 높이 여겨 궁정신료들의 종사(宗師)로 삼았으며 그에게 당상관에서 영의정까지 제수(除授)하였다.
이렇게 임진왜란중에 신덕산 수도사에 주둔하면서 전체 승병을 지휘한 사명대사와 유곡 세간에서 창의한 의병장 곽재우가 의령지역 임진왜란 의병의 주역이지만, 현재 의령군에서는 의병제전을 통해 곽재우 홍의 장군만을 기리고 사명대사에 관해서 전혀 조명되어지지 않아서 애석할 뿐이며, 이런 사실에 관하여 연구조사 조차 전무한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참고문헌
1.해인사 보물 제 1301호 석장비
2.계룡산 칠월칠석 구선제
3.임진왜란 관련 글/불교신문
4.문화재 경남59호고성 옥천사 향로/국보 75호 표충사 향로
5.의령 수도사 역사
6.분충서난록(사명대사 임진왜란 활약기)
의병장 사명대사 홍보 안내판 설치(수도사) 답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