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우륵의 출신지 의령
악사 우륵과 관련하여 예전에는 막연히 우륵 12곡을 만든 가야사람 정도로 인식하여 왔으며 우륵과 관련한 연구는 주로 그의 음악적 활동에 대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최근 지방자치제의 발달과 더불어 인물중심의 옛 성현들에 대한 조명이 이루어지고 이것이 지역 브랜드화 되면서 일종의 지역 자긍식과도 결부되어 출신지 문제가 중요한 화두로 부각되고 있다.
문헌이나 사료에서 출신지에 대해 명백하게 기록하고 있다면 별 문제는 없겠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못하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 갈수록 전하는 기록은 극히 드물고 그 기록 또한 당대의 기록이 아닌 후대의 기록이 대부분이다. 우륵이 활동했던 삼국시대 기록의 경우 주지하다시피 고려시대에 김부식에 의해 편찬된 삼국사기가 최초이다. 삼국사기는 통일전쟁에서 승리한 신라중심의 기록으로 통일전쟁에서 밀려난 고구려나 백제는 신라에 비해 기록의 대상이나 양이 소략하며, 가야의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우륵의 출신지 문제도 이러한 명확한 고대 기록의 부재에서 기인한다. 이 문제의 초점은 삼국사기 악지『三國史記 樂志』에 우륵의 출신지라고 기록된 성열현(省熱縣)이 과연 어디인가에서 출발한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연구 성과와 동향을 보면 ①경남 의령군 부림면이라고 보는 설이 학계의 정설로서 대다수의 학자들로부터 지지를 받아오고 있는 가운데, ②충북 제천군 청풍면(옛 지명 沙熱伊縣)이라고 보는 설, ③대구광역시 동구 불로동 일대(옛 지명 雉省火縣)라고 보는 설, ④경북 고령 우곡면 ․ 개진면과 성주 사이의 고령군 관내 지역으로 보는 설, ⑤경남 거창군 가조면 석강리 소새[省草] 마을이라는 설 등이 거론되고 있다. 이러한 諸설들은 역사학자와 국문학자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으나 최근 들어 일부지역의 경우 비전공의 학자까지 가세해 논란이 확산되는 추세다.
역사의 고증에 있어 가능한 한 모든 자료를 객관적으로 다뤄야 함은 물론이겠거니와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자료가 사실관계를 밝힘에 있어 한계가 있을 때에는 고고학적 자료를 통해 그 대안을 모색하고 보완하는 것이 중요하다.
주지하다시피 우륵은 대가야 가실왕의 부름을 받고 가야금 12곡을 만들었으며, 6세기 중엽 경에 신라로 건너가 가야금과 우륵 12곡을 전한 인물이다. 우륵 12곡의 제작시기, 그리고 망명시기와 동기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서 다소 이견이 있지만, 출생지에 대해서는 국내외 학계에서 의령 부림설이 가장 많은 지지를 얻고 있으며, 학계의 정설로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지금까지 기존 견해를 살펴보고 정리를 하면 먼저 충북 제천의 청풍설은 제천 땅이 일찍이 가야의 영역이었던 적이 없기 때문에 악사 우륵이 가야 가실왕의 부름을 받고 우륵 12곡을 만들었다는 <<三國史記>> 卷32, 樂志 加耶琴 條의 기록과 배치되어 제외한다.
그리고 두 번째 대구광역시 동구 불로동 설도 최근 고고학적 조사 등을 통해 살펴보면 5세기 중엽에서 후엽에 조성된 걸로 추정되는 불로동 91․93호분의 출토유물이 신라계 유물일색으로 이 지역이 일찍이 신라의 영향아래 놓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대구 동구 불로동 설도 악사 우륵이 가야인이라는 기록과 맞지 않다. 세 번째 경북 고령설의 경우 ‘성열현’이라는 지명이 대가야 당시의 것이며 대가야 주위에는 가야연맹에 소속된 ‘제국(諸國)’이 있었으므로, 성열현은 대가야 관내에 있는 직할현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지명을 전하는 신라고기의 용례로 보아 성열현이라는 지명은 가야 당시의 지명이 아니라 가야멸망후의 신라의 것이거나 삼국사기 편찬시기인 고려의 지명으로, 대가야시기에 수도에 현(縣)을 설치했다는 주장은 가야의 사회 상황과 맞지 않다.
네 번째 거창 가조설은 성열이라는 한자 지명이 ‘소사리’라고 발음되었으며 그것이 현재 가조면 省草마을의 지방 발음인 ‘소새’와 같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그 설명만으로는 전국의 35개 이상의 ‘소사리’ 및 ‘소새’ 지명 중에 어째서 거창군 가조면의 것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당위성이 약하다. 그리고 거창설의 경우 가조분지의 가야집단을 가소가야(加召加耶)라 칭하시며 삼국사기 악지에 나오는 가실왕을 가소왕으로 보고 있으나, 거창의 가조가 가야의 한 정치집단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고고학적으로 그를 뒷받침할 만한 유적이나 유물이 나와야 한다. 가조면 일대에는 물론 석강리 고분군이나 사병리 고분군 등이 분포하지만 규모면에서 하나의 정치체로 상정하기에는 규모가 너무 작다. 특히 우륵이 활동했던 5세기후반에서 6세기전반대의 가야의 정치집단들은 예외 없이 대형의 봉토분을 조성하고 있으므로 가조지역이 하나의 가야정치집단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대형의 봉토분의 조성과 위세품 출토 등이 따라야 한다. 그런데 가조면의 경우 그나마 규모가 크다고 하는 석강리 고분군이 10미터급 정도의 봉토분이며, 일부 도굴된 자료를 통해 보면 대부분 중․소형의 석곽묘들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의령 신반지역의 경우 직경 25m내외의 경산리 고분군과 유곡리 고분군 등이 분포하고 있다.
이에 반해 의령 부림설은 삼국사기에 전하는 우륵의 출신지 성열현과 관련하여 옛 지명인 신이현과의 音相似 뿐만 아니라 644년 삼국사기 전쟁기사의 전투 범위의 위치 등에서도 맞아 떨어진다. 즉 644년과 645년에 이르는 신라와 백제의 공방은 낙동강을 따라 벌어졌으며, 그 전장의 길이는 상류 쪽으로는 경북 구미시 일대(同火城)로부터 고령군 우곡면(加兮城)을 거쳐 하류 쪽으로는 밀양시 삼랑진읍 일대(買利浦城)까지 미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열성을 우곡면과 삼랑진 사이의 요해처인 의령군 부림면 일대로 비정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고고학적 자료를 더하여 살펴보면 먼저 우륵이 550년경 신라에 투항한 사실과 관련하여 의령 동북부 일대 가야고분군의 고고학적 조사성과를 통해 볼 때 이 지역은 경산리고분군, 유곡리고분군, 오천리고분군을 축으로 하는 하나의 가야 소정치체가 의령읍 중리고분군을 중심으로 하는 가야의 소정치체와는 별개로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륵이 신라로 투항한 6세기 중엽의 이 지역 가야고분의 출토유물은 대가야계유물과 거의 대등하게 신라계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이는 의령의 부림일대가 대가야를 중심으로 하는 후기가야연맹의 일원이면서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창녕지역의 신라세력과도 활발한 교류를 하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562년 대가야가 신라에 의해 멸망되기 이전에 친신라적 성향을 띤 이 지역의 가야집단은 신라에 의해 자연스럽게 병합되었을 것으로 보이며 그 시기는 우륵이 신라로 넘어간 550년을 전후한 시기가 아닐까 생각된다.
이렇게 볼 때 우륵은 가야후기 대가야연맹의 일원인 의령 부림지역의 한 소국(사이기국) 사람으로서 5세기 후반경에 태어나 음악적 재능을 발휘하였으며, 이후 그 음악적 재능이 가야연맹의 맹주국인 대가야에 까지 알려져 가실왕의 요청으로 우륵 12곡을 짓는 등 맹주국인 고령을 오가며 음악적 재능을 발휘하였다. 그러다가 6세기 중반경 대가야를 중심으로 한 후기가야연맹의 세력이 와해되기 시작하고 일찍부터 낙동강 넘어 창녕 쪽의 신라 세력과 활발한 교류를 해오던 부림지역의 가야소국은 신라에 의해 자연스럽게 복속 내지는 합병되었을 것이다. 그 후 우륵이 신라로 건너가 남은여생을 충주, 제천 일원에서 음악적 활동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우륵의 삶과 생애와 관련하여 우륵은 5세기후반 의령 신반지역의 가야소국 출신으로 당시 고령의 대가야를 중심으로 하는 연맹국의 일원이었다. 6세기 전반에 후기가야의 맹주이던 대가야 가실왕의 명을 받고 우륵 12곡을 짓는다. 550년을 전후한 시기에 이르면 백제와 신라의 가야지역에 대한 패권이 강화되면서 나라가 혼란스러워지자 일찍이 의령의 낙동강 건너 창녕지역의 신라세력과 많은 교류를 가짐으로써 친신라 성향이었던 우륵은 그의 제자 이문과 함께 가야금을 들고 그의 음악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신라로 망명을 길을 택한다. 그러나 그에 대한 예우와 음악적 행보 등에 있어 신라행이 순탄치 많은 않았으나 그의 음악적 이상은 신라 대악으로 채택되어 우리나라 3대 악성으로 추앙받으며 오늘날에까지 전해지고 있다.
우륵의 삶과 생애
‘악성(樂聖)’이라는 말을 생각해 본다. 본래 ‘악지성인(樂之聖人)’의 줄임말이다. 음악의 성인이라 이를 만한 뛰어난 음악가라는 뜻이다. 가야의 우륵, 고구려의 왕산악, 조선의 박연, 이 세 사람을 우리나라의 3대 악성(樂聖)이라 부른다. 언제, 누가 이들에게 ‘악성’이라는 이름을 부여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이들이 그러한 호칭에 걸 맞는 인물임에는 분명해 보인다. 우륵은 가실왕이 만든 가야금의 음악을 만들고 지켜냈으며, 왕산악은 거문고를 만들었고, 박연은 세종 때 음악을 정비하여 조선 전기의 음악을 일정한 수위에 올려놓았다. 세 사람 모두가 시대를 달리하여 태어났지만 음악 분야에 정통한 인물 즉 프로페셔널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그들이 악성이라는 이름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전문가’라는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재능과 투철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렇듯 우륵은 박연, 왕산악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악성으로 추앙받는 인물이지만 탄생, 성장과정, 음악적 업적 등에 대한 기록은 거의 전무하다. 『삼국사기』에 단편적으로 실린 기록이 전부라고 할 수 있다. 내용을 정리하여 보면 가야 성열현(의령 신반) 출신 우륵에 대한 대가야 가실왕의 부름과 가실왕의 요청에 의한 우륵 12곡 작곡, 제자 이문과 함께 신라 망명, 신라에 대한 가야금과 그 음곡의 전수, 가야금과 그 음곡의 신라대악 채택 등으로 요약된다. 즉 전체적으로 우륵의 삶과 생애를 살펴 볼 자료로는 지극히 단편적이고 소략하여 한계가 따를 수밖에 없다. 『삼국사기』 잡지(악) 가야금조의 ‘羅古記’에 따르면 우륵은 ‘省熱縣 출신의 악사로서 가야국 가실왕의 명에 의하여 諸國의 方言을 하나의 ‘聲音’으로 통일하기 위해 가야금 음곡 12곡을 만들었다.’고 전하고 있으며,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가야국 가실왕은 열두 달의 음률을 본 따 12현금을 만들고 우륵에게 열두 곡을 만들도록 하였는데 우륵은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악기를 가지고 신라로 의탁해 왔으며 그 악기 이름이 가야금이다.’라고 적고 있다. 우륵의 신라 망명이후의 행적 역시 『삼국사기』 잡지(악)와 신라본기에만 단편적으로만 전하고 있는데 ‘우륵이 신라에 의탁해 오자 진흥왕은 국원에 안치하고, 곧이어 낭성에 순수하여 가궁인 하림궁에서 우륵과 제자 이문을 불러 ‘新歌’를 연주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듬해 진흥왕은 ‘계고(階古), 법지(法知), 만덕(萬德) 세 사람에게 명하여 우륵에게 음악을 배우도록 하였다. 우륵은 그들의 재능을 헤아려 계고에게는 가야금을, 법지에게는 노래를, 만덕에게는 춤을 가르쳤다. 학업이 끝나자 왕이 그들에게 연주하게 하고, 말하기를 “예전 낭성(娘城)에서 들었던 음과 다름이 없다.” 하고는 상을 후하게 주었다.’라고 하였다.
이상에서 앞서 살펴본 우륵의 출신지와 『삼국사기』에 전하는 단편적인 우륵관련 사료를 근거로 우륵의 삶과 생애를 유추해보면 다음과 같다.
우륵은 가야국의 궁정악사로 성열현(의령)에서 태어났으며 , 가야의 가실왕과 신라의 진흥왕 (재위 540~576)과 동시대 인물이다 . 당시 가야국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연맹을 맺고 자신들의 영역을 지키고 있었는데 , 나라의 어려운 운명을 감지한 악사 우륵은 대가야가 진흥왕에 의해 정복당하기 전인 550년경을 전후로 가야금을 들고 신라로 망명하였다 . 이에 신라 진흥왕은 우륵을 지금의 충주지역인 국원에 안치시키고 세 명의 신라 귀족들을 보내어 가무악을 전수받게 하였다. 제자들에 대한 악곡 전수 과정에서 우륵이 단지 가야금의 악사만이 아니고 가무악을 모두 다룰 수 있는 종합예술인 이었음을 삼국사기를 통해 확인 할 수 있다. 세 제자의 재능에 따라서 각자의 전공을 정해주고 학습을 시켰다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이를 반증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즉, 신라 17관등 중 열 번째 관등인 대나마 법지에게는 노래를, 계고에게는 가야금을, 그리고 열두 번째 관등인 대사 만덕에게는 춤을 전수하였던 것이다.
당시 신라 관료들이었던 우륵의 제자들은 우륵에게 전수 받은 12곡을 ‘음악이 번거롭고 음란하다’는 이유로 스승의 동의 없이 5곡으로 개작하여 연주해서 우륵의 심기를 건드렸다. 하지만 우륵이 막상 그들이 개작한 음악을 듣고는 ‘즐겁지만 지나치지 않고 애처롭지만 슬프지 않으니 과연 올바른 음악이다.’ 라고 말하며 당시 음악에 있어서도 공자의 예악사상인 중용의 도를 철학적 근거로 삼고 있음을 상기하며 눈물을 흘리며 받아들인다.
상술하였듯이 우륵은 생몰 연대를 알 수가 없고 대가야의 악사가 되기까지의 과정도 전혀 알려져 있지 않으며, 신라 망명 이후의 행적도 국원에 안치된 것 말고는 전하는 바가 없다. 다만 그간의 연구 성과를 토대로 기록된 사료에 살을 더 붙여 우륵의 삶을 더듬어 보자면 우륵은 경남 의령 지역의 가야출신으로 5세기 4/4분기에 태어나서 6세기 1/4분기에 후기가야의 맹주국 대가야 가실왕의 부름을 받고 우륵 12곡을 제작한다. 그러다가 고향인 의령지역에서 일찍이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창녕지역의 신라세력과 활발한 교류를 통해 친신라 성향을 띠었던 우륵은 후기가야의 맹주국인 대가야가 이뇌왕 시절인 522년 신라와 결혼동맹을 맺은지 7년만인 529년에 ‘신라의 변복’ 문제로 결혼동맹이 결렬 되면서 친백제․ 반신라 정책을 취하자 자신의 입지와 역할이 좁혀졌고 이에 가야금을 가지고 제자 이문과 함께 조국 의령을 떠나 신라로 망명한 것으로 보인다.
우륵이 신라로 망명한 시기는 사료를 참고하면 540년에서 551년 3월 이전의 어느 시점일 것이다. 우륵이 신라로 망명했을 당시 신라의 왕은 진흥왕이었다. 망명이후 우륵에 대한 신라가 취한 예우는 조국 가야지역에서의 우륵의 위상에는 걸맞지 않은 듯하다. 진흥왕이 우륵을 신라의 왕경인 경주가 아닌 국원인 충주에 안치한 점이라든지 우륵에게 가야금과 그 음악적 재능을 전수 받은 제자들이 우륵 12곡을 ‘번거롭고 음란하여 아담하고 바르지 못하다’고 하면서 스승 우륵과의 사전 상의도 없이 5곡으로 줄이는 무례를 범하는 점 등에서 가야 악사 우륵에 대한 신라인의 정서를 느낄 수 있다. 그렇지만 우륵은 처음에는 크게 화를 내었지만 가야의 망명객으로서 자신의 현실을 직시하고 그의 음악적 이상의 맥을 단절시키지 않기 위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러한 까닭에 우륵의 정치적 망명은 꼭 성공적이었다고 말 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음악가로서 우륵의 선택은 성공적 이었다고 평가 할 수 있다. 우륵은 562년 가야의 멸망을 직접 목격한 후 560년대 어느 시점에 생을 마감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륵은 가야(의령) 사람이었지만 온전한 가야인으로서는 생을 마감하지 못했다. 또 정치`외교적으로 친신라 노선을 견지해 신라 망명을 선택했지만 신라인으로 제대로 활동하지도 못했다. 이런 점에서 우륵은 가야와 신라 양쪽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의 천재적 음악적 재능은 신라에 의해 계승되어 1500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도 민족의 음악으로 연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즉 우륵은 가야금을 통해 사라지지 않는 제국, 가야의 이름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