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는 고루 또는 물불이고 아명은 계찬(啓贊)으로 1893년 8월28일 지정면 두곡리 823번지에 전의이씨 근주공과 모친 성산이씨 사이의 5남3녀중 다섯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16세까지 농사일을 도우고 두남재(斗南齋□지금은 경사재「敬思齋」로 바뀌었음)에서 한학을 익혔고 1910년부터 1913년(2년간) 마산창신학교에서 신학문수업을 하였다. 1913년 4월 서간도로 가서 항일애국지사들과 교유하는 한편 민족종교인 대종교에 입교하고 부설학교인 동창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15년에 귀국하여 중국으로 건너가 동제대학(同濟大學)예과에 입학1920년에 졸업후 본과에 진학했다. 1922년 독일 베르린대학 철학부에 입학하여 4년과정을 마치고 1년간 연구생으로 근무했다.
1923년 베르린대학에 조선어학과를 개설하게 된 것도 고루박사의 노력의 결과였고 3년간 강사로 근무했다. 1927년「중국의 생사공업」이란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그해 6월에 영국 런던대학에 입학하여 정치경제학을 고학으로 수업했다.
1928년 미국으로 가서 이승만박사와 한동안 지냈고 이듬해 조선어연구회에 입회하여 민족의식고취와 항일운동에 헌신키로하고 1931년에 「조선어학회」로 이름을 바꾸고 한글사전 편찬 사업에 전심했다. 1942년 10월 1일 조선어학회사건으로 고루선생을 비롯하여 많은분이 체포되었고 그 중 16명이 기소되었는데 1945년 1월 6일 선생은 징역6년을 선고 받았으며 고문과 악형은 말 할 수없이 참혹했다.
다행히 그해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여 8월 17일 출감했다. 광복이후 한글운동과 함께 조국통일 정부수립을 위한 정치활동에도 적극 참여하면서 1948년 4월 남북 모든 사회 단체대표자 연석회의 참석차 월북한 뒤 그대로 북쪽에 체류하였다.
그해 8우러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에 진출되었고 여러조직을 역임하시다 1978년 9월13일 71세를 일기로 서거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