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곡면 내조마을
면소재지에서 약 1.5km쯤 되고 자굴산자락에 자리 잡은 마을이다. 본동(큰동네), 양천, 아래땀, 솔밭등너머까지 네 뜸으로 된 대동고촌(大洞古村)인데 옛 이름은 「첸」「체인」으로 불러왔다. 확실한 기록은 없지만 아마 신라때의 이두(□)표기의 동명을 쉽고 뜻이 좋은 글자로 바꾸어 쓴 것으로 생각된다. 이 마을은 신라 때 우리고을 장함현의 읍지였다는 기록이 있고 서쪽 산밑에 허물어진 옛터가 있다니 마을의 형성 연대와 역사가 퍽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약 170여년전에 조직한 동안(洞案)즉 향약의 일종인 마을 자치규범의 명칭이「조연동절목(槽涎洞節目)」이다. 이를 보건대「조연동」이란 이름으로도 불리었다는 근거가 되며 이 절목에는 마을은 21성 89호가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 마을은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와우안식(臥牛安息)의 명지라는 바 큰 황소가 배불리 먹고 누워서 새김질을 하면서 침을 흘리고 있는 지혈이라 보통 와우설(와우혈)이라 말한다. 자굴산이 황소 머리고 동남으로 억세게 뻗은 산줄기가 몸퉁이며 마을은 구시(구유)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내외조(內外槽)로 분동이 된지는 얼마 전의 일이고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그냥 「질우(길위)」「노상(□上)」이라고 불렀던 마을이다. 협동인「양천이」도 한땐 양천(□川)으로 썼다가 뒤에 양천(陽泉)으로 한자만 바꾼 것이라 한다. 읍지였을 때는 향교가 있었다고 하며 양반자제들을 모아 가르치던 교육기관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아래땀」조금 위에는 길 양쪽에 조산이 있고 수백 년 묵은 느티나무와 홰나무가 서너그루 있다. 「조산껄」로 불리는 이곳은 동신제도 올리던 신성금기의 지역이었고 목장승까지 우뚝 서 있었다. 그 옆을「별신데이」라는데 옛날 당집(별신당)이 있었고 새각시가 신행 올 땐 반드시 제물을 차리고 통과례를 드렸던 곳 일뿐만 아니라 마을사람들도 원행출타할 때면 꼭 잔을 올리곤 했다. 당집이 있던 터가 논인데「귀신배미」고 거듭되던 흉년에 칡뿌리를 캐다주고 얻었다는「갈근배미」, 굴밤 한말과 맞바꾼 「굴밤배미」, 찬물이 들어서 나락농사가 어려운「찬물배미」는 살사람도 없는 돌채도가리다. 마을 안에는「원터」「원새미」가 있는데 아득한 옛날 관아가 있었던 자리임을 알 수 있다. 죄인을 가두었던 집이 있었던 자리가「옥터밭」이고「망둥거리」「법수거리」등 모두 형옥과 관계되는 땅이름이다. 장(시장)이 섰다는「장태물」, 덜렁 들어 얹힌 밭이라고 「밭등때」는 서마지기 한 떼기 밭이다. 마을 서북쪽에「재골티」재는 모의골로 통하고「질미재(길마재)」는 운암상촌(굴바구)으로,「달분재」는 갑을로 넘어가는 잿길이다. 양천마을 앞산에는「그륵재(그릇재)」가 있는데 재라기보다는 언덕인데 도자기 부스러기가 많이 발굴되는 걸 보면 아마 도요지거나 고분자리가 아닌지 모르겠다. 논밭 다음으로 삶의 터전이었던 자굴산은 이 마을 사람들과는 불가분의 관계였다. 나무꾼, 풀꾼, 약초꾼들이 담배 한 대 피우면서 잠깐 쉬던 곳이라고「담배차미」(차미는 참(站)인데 쉴만한 곳을 뜻함)와「쉴보탄」도 있다. 아무리 추운 겨울철에도 눈이 쌓이지 않으며 바람도 비켜가는 볕바른 곳으로 오목하고 아늑한 자연지형이라 찾기 힘든 명당자리로 믿고 있는 「쉴보탄」이다. 또 「질미재」못 미친 중턱엔「약새미(약샘)」가 있어서 눈비가 내려도 얼지 않는 샘이고 생기한 풋내가 나는 물은 속병에 좋다고 소문난 약수다. 자굴산 등산로가 있는 「진등(긴등)」을 조금 오르면 호수설무덤(虎首穴墓)이라 해서 퍽 신기한 얘기가 전해진다. 통덕랑 허제(許梯)님의 묘로서 자손이 벌초를 하거나 성묘를 했다하면 그 날로 악질눈병이 생기고 돌까지 고생을 한다는 것이다. 한 두 번의 일도 아니라서 후손들은 면소재지에서 망배(望拜)성묘를 하고 있으며 벌초는 아예 타성사람께 맡겨놓고 있는 불가사의한 묘로 유명하다. 경주 김(金), 경주 최(崔), 나주 임(任)씨등 서너집이 머리(머루), 다래넝쿨 쳐내고 터 잡았다는 얘기가 전하고 있으며 얼마 뒤 광산김씨가 들어와서 동네가 커졌다고 한다. 현재 담양 전(田)씨 35집, 경주 김(金)씨 8집, 밀양 박(朴)씨 5집에 다른 성받이는 서너집씩으로 1백호 넘던 대촌이 65집으로 줄었다. 동구밖에 경주 이(□)씨부인의 효부비가 있고 개울건너에 유서깊은 「죽림정사(竹林精舍)」도 어수선한 분위기였다.